1. 역사적 배경과 출처
야마대시여서는 일본의 미래를 예언한 한편의 한시(漢詩) 형식 예언서로, 전통적으로 중국 남조 양(梁) 시대의 고승 보지(宝誌)和尚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보지和尚(한국에서는 바오즈 선사로도 알려짐)은 6세기경 예지력으로 유명한 승려였는데, 이 예언시는 그가 일본의 장래를 내다보고 지은 것이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은 야마대시가 실제로는 일본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창작한 위작(僞作)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언어학적·내용적 정황상 서기 1000년 이전인 늦은 고대~헤이안 시대 초에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야마대(邪馬台)”는 중국 역사서 위지 왜인전에 등장하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으로, 곧 고대 일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제목부터 일본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암호화된 표현입니다.
야마대시의 기원에 대해 전하는 초기 기록들을 살펴보면, 가마쿠라 시대 편찬물인 《연력사 호국연기》(延暦寺護国縁起)에 이 예언시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연력 9년(서기 790년)의 주(注)”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어,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늦은 나라 시대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언시일 수 있습니다. 또한 936년(쇼헤이 6년)에 작성된 《일본기 사기》(日本紀私記)라는 *일본서기 주석서의 문답 기록에도 이 예언시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기록에서는 “보지(宝志)의 예언에 ‘동해의 공주 씨족의 나라(東海姫氏之国)’라 언급되어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본 왕실은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시조로 하고 여제(女帝)인 진구 황후도 있었으므로, 일본을 이처럼 ‘공주 씨족의 나라(姫氏国)’로 일컬은 것이다”라는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이로 보아 예언시가 “동해에 있는 공주의 나라”라는 암시로 일본을 지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전승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편찬된 설화집 《강담초》(江談抄)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의 학자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가 8세기경 견당사로 당나라에 갔을 때, 당 황제 현종 앞에서 난해한 예언시 한 편의 해독을 명받았습니다. 이 시가 바로 야마대시였는데, 원문이 일부러 글자 순서를 뒤섞어 놓아 쉽게 읽히지 않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키비가 뜻을 이루지 못해 고심하던 중 일본의 신불(神仏)들께 기원했더니, 한 거미가 천장에서 내려왔습니다. 마키비는 떨어진 거미가 기어간 자국을 따라 글자를 짚어가며 배열한 끝에 비로소 시를 온전히 읽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 거미의 도움으로 예언을 풀었다는 일화는, 동 시대에 제작된 《기비 대신 입당 그림 두루마리》(吉備大臣入唐絵巻)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전설은 야마대시여서가 일본에 전해진 경위를 신비화하여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예언서의 출처를 중국 당나라로 꾸며 그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실제 창작자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일본의 승려나 지식인 계층이 고대 중국 예언서 풍을 빌려 지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2. 문서의 주요 내용과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
야마대시여서는 총 120자 분량의 한시로, 5자씩 24구로 이루어진 예언시입니다. 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일본 왕조의 장구한 치세를 노래하고 후반부는 미래에 닥칠 대혼란과 멸망의 정경을 암시합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 왕조의 창업과 안정된 치세: 동해에 위치한 “공주 씨족의 나라”에서 천신(天)으로부터 위임받아 사람이 다스리는 시대가 열리고, 백대(百代)에 걸쳐 천자가 나라를 다스린다고 예언합니다. 초창기에는 법(法)에 따라 통치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성대히 모시는 등 정치와 질서가 잘 확립되어, 군신(君臣) 간의 지위와 시작과 끝이 제대로 정해졌다고 묘사됩니다. 이는 일본 천황가의 오랜 통치와 안정된 전통을 상징하는 대목입니다.
- 불길한 징조와 사회 혼란: 그러나 중엽에 이르면 이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전답이 묻혀버려 귀인(貴人)이 달아난다"거나, "생선회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간다"는 기괴한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자연재해나 기근으로 농지가 황폐해지고 사회 질서가 뒤집히는 상황(하극상)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나라의 기반이 무너지고, 기존 지배층이 쫓겨 다니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넘어서는 격변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해석자들은 “물고기에 날개가 돋는다”는 구절을 하극상의 시대 도래로 풀이했습니다.
- 왕조의 쇠퇴와 이질적인 혼란상: 혼란이 깊어지면서 나라의 중심 세력이 약해지고, 신분이 낮은 자의 자손이 번성하게 됩니다. 예언시는 이어서 “하얀 용이 물을 잃고 궁지에 몰려 오랑캐 성에 몸을 의지한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백룡(白龍)은 천자의 상징으로, “용이 물을 잃었다”는 것은 황실이 근거지를 잃고 권위를 상실했음을 뜻하고, 결국 외부 이민족의 힘에 기대게 된다는 암울한 암시로 읽힙니다. 또한 “노란 닭이 사람을 대신해 먹을 것을 먹고, 검은 쥐가 소의 창자를 먹는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닭과 쥐 같은 하등한 존재가 인간이나 소 대신 음식을 먹는 뒤틀린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는 역병이나 흉년에 따른 기괴한 현상 혹은 민심의 극도의 혼란을 상징한 것으로 보입니다.
- 왕조 붕괴와 영웅호걸 출현: 예언시의 후반 클라이맥스에서는 드디어 왕실의 운명이 다합니다. "붉은 물(丹水)이 모두 말라버린 후에 천명(天命)이 삼공(三公)에게로 옮겨간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궁궐(왕실)이 쇠퇴하고 하늘의 뜻이 삼공(三公), 즉 대신급 권신들에게로 넘어감을 의미합니다. 결국 “백왕의 계보가 마침내 다하여 끊어지고(百王流畢竭)”, 더 이상 천황의 통치가 지속되지 못함을 선언합니다. 왕통이 단절된 뒤에는 “원숭이와 개가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세상이 펼쳐진다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원숭이와 개는 품격 없는 영웅, 또는 간신배나 외적을 가리키는 은유로 해석되며, 나라를 구할 영웅을 참칭하는 자들이 등장함을 뜻합니다.
- 전쟁과 멸망의 결말: 이후 "별똥별이 들판에 날아 떨어지고, 징과 북소리가 나라 안에 울려퍼진다"고 하여 전국적인 전란의 발발을 묘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푸른 언덕과 붉은 땅이 아득히 텅 비게 되리라"는 구절로 끝맺는데, 이는 온 국토가 황폐해져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최후의 멸망을 암시합니다. 일부 해석자들은 여기서 청구(青丘)와 적토(赤土)를 각각 일본과 주변의 다른 땅(이를테면 조선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음)으로 보기도 하나, 전반적인 의미는 광대한 세계가 최후에는 공허한 폐허로 돌아간다는 묵시록적 경고입니다.
이처럼 야마대시는 일본 왕실의 기원에서부터 종말까지를 함축적으로 그려낸 서사시적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반의 장구한 통치와 후반의 파국을 대비시킴으로써, 흥망성쇠의 거대한 흐름을 암호 같은 시어로 예고한 것입니다. 각 구절이 매우 상징적이어서 문면만 봐서는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난해함 덕분에 시대와 해석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풀이될 여지가 컸습니다.
3. 예언서의 일본 역사에서의 의미
야마대시여서는 일본 역사 속에서 종말론적 사고와 국가 정통성 논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천황 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중세인의 불안과 관심이 이 예언을 통해 표출되었는데, 그 핵심이 되는 것이 이 시에 언급된 “백왕설(百王説)”입니다. 이는 천황이 100대까지 계승된 후에는 더 이상 왕통이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종말론으로, 헤이안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초 승려 지엔(慈円)이 쓴 역사서 《구칸쇼》(愚管抄)에도 “인세(人代)가 되어 신무 천황 이후 백대가 한계라 전해진다. 이미 84대에 이르렀다…”는 구절이 등장하여 당시 백왕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3세기 불교 승려 니치렌(日蓮)도 저서 《입정안국론》에서 “아직 백왕이 다하지 않았는데도 이 세상이 벌써 쇠퇴했다”고 언급하여, 사회 혼란을 야마대시의 백왕 예언과 연결지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중세 일본인들이 천황의 계보가 정해진 끝(百代)으로 종언을 맞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야마대시 예언이 그 배경에 자리했음을 시사합니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실제로 북조를 기준으로 천황의 재위 숫자가 백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예언이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주목했습니다. 15세기 초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도 백왕설에 관심을 보여, 1402년 조정의 학자에게 “백왕의 근거”를 문의한 일이 있습니다. 학자는 고사기에 나오는 ‘백왕(百王)’이 단순히 많은 수를 비유한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역사학자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 등은 요시미쓰가 야마대시 예언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황위 찬탈이나 새로운 왕조 개창을 노려본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예언시는 왕조 교체나 정치 변혁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상적 자극제로 작용했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예언이지만, 한편으로 무로마치 권문세족이나 불교 예언사상가들에게는 향후 정국을 예측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로 소비되기도 한 것입니다.
야마대시의 각 구절은 역사적 사건에 빗대어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13세기 말 원나라의 일본 원정(원구, 元寇) 직후에는 “원숭이와 개가 영웅을 자칭한다”는 구절을 원(몽골)과 그에 협력한 만주/중국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마쿠라에 있던 옛 왕족 출신 공령 아시카가 시마쓰(足利氏満)가 원숭이해(申年) 출생이고, 교토의 실권자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개해(戌年) 출생인 점에 착안하여, 예언의 원숭이와 개를 이 두 사람으로 보는 설이 유포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황폐화된 후에는, 난의 주동 세력인 야마나 소젠(山名宗全)과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를 각각 원숭이(신년생)와 개(술년생)로 비정하여, 이들이 싸움에 나라가 망했다는 식으로 예언과 현실을 연결지었습니다. 당시 난의 기록을 담은 《오닌기》(応仁記)에는 “예언의 성취”로서 전란 이후 쇠잔해진 교토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야마대시가 그때그때의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되면서 사회적 위기의식과 맞물려 유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의 모호함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사건을 거울처럼 비춰보게 하는 매개가 되었고, 각 시대의 불안과 염원이 투영된 다양한 설화와 담론을 낳았습니다.
에도 시대에 들어 야마대시여서는 보다 대중적 흥미의 대상이 됩니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던만큼 실제 종말의 공포보다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예언으로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에도 후기에 야마대시를 본딴 패러디 예언시들이 유행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을 일으키는 거대 메기 전설과 결합된 「야보대시(野暮台詩)」,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사건을 빗댄 「야보대지의 무사(野暮代之侍)」, 19세기 초 북부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인 산페이이키(三閉伊一揆)를 예언한 「남부일揆 야마대시」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심지어 「야만대시」, 「헤쿠라대시」처럼 우스꽝스럽게 이름을 변형한 작품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원전 야마대시의 형식을 모방하여 일부러 글자를 뒤섞은 암호시 형태로 작성되었고, 특정 규칙에 따라 해독하면 현실 정치나 사회풍자를 담도록 꾸며졌습니다. 이러한 2차 창작물의 존재는 야마대시 예언이 에도 시대에 일종의 인기 있는 미스터리 문화로 소비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에도시대 여러 문헌에 야마대시가 인용되고, 1822년(분세이 5년) 간행된 판본 등이 현존하는 등, 활발히 유포되던 정황이 확인됩니다. 요컨대 야마대시여서는 나라가 혼란한 중세에는 불안의 투영으로, 평온한 에도에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그 의미와 역할을 바꾸어가며 전승된 것입니다.
4. 학계의 평가와 해석
현대 학계에서는 야마대시여서를 일본 중세의 전형적인 “미래기”(未来記) 계열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미래기란 왕권의 미래나 세계의 말세를 예언 형식으로 서술한 문학으로, 《성덕태자 미래기》, 《민덕왕 미래기》 등 여러 위작 예언서들이 중세에 유행했습니다. 야마대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서술을 가장한 가짜 예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예언시의 체제가 중국의 전통적인 참위(讖緯) 사상이나 한대 예언시 형식을 닮아있지만, 내용 면에서는 일본 고유의 전승(아마테라스, 진구황후 등)과 정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중세문학 연구자 고미네 가즈아키(小峯和明) 교수는 저서 《중세 일본의 예언서 – 미래기를 읽는다》 등에서 야마대시여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이 역사Narrative로서 기능했다고 분석합니다. 즉,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역사를 초자연적 예언 형태로 기술함으로써 현실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거나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야마대시는 겉보기에는 일본의 운명을 예언하는 신비한 시이지만, 그 기저에는 “제아무리 영원할 것 같은 왕조도 결국 무너질 수 있다”는 무상관과 종말론적 경고의식이 담겨 있어, 이를 지은 이는 아마 당시의 시대적 위기감이나 권력 변동에 대한 통찰을 투영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야마대시가 창작된 배경으로, 8세기 후반~9세기 초 왕위 계승 문제나 불교적 말세사상(말법 사상)의 영향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나라 시대 말엽에는 몇 차례 여제가 즉위한 뒤 더 이상 여성 천황이 나오지 않게 되는 변화가 있었고, 헤이안 초에는 새 왕조(후지와라 섭정 시대 등)를 앞둔 과도기였습니다. 이러한 전환기에 누군가가 왕실의 미래를 점치는 예언을 만들어 유포함으로써, 권력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거나 민심을 다스리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확한 제작 동기와 시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일본설 이외에 중국 기원설도 소수 제기된 바 있습니다. 중국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선 문자와 내용상의 근거로 보아 일본 내 제작설이 유력합니다.
한편, 이 예언서의 신빙성에 대해서 학자들은 회의적입니다. 실제 역사 전개와 예언 내용을 비교하면 맞아떨어지는 듯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애초에 시 구절이 의미가 모호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에 등장하는 자연재해나 반란, 궁정 쇠망 등의 이미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야마대시는 실제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사건을 끼워맞춘 것에 가깝습니다. 역사상 중요한 변란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예언시 속 구절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소름끼치게 들어맞는다”고 여겼지만, 정작 예언이 선제적으로 경고하여 대비하게 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야마대시의 내용은 역사 예측이라기보다는 역사 해석에 가깝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지적입니다.
학계에서는 또 이 예언서가 미친 영향력에도 주목합니다. 비록 그 신빙성은 낮지만, 야마대시는 일본의 사상사와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중세 승려나 예언가들은 이 시를 인용하며 당시 사회혼란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종교적 각성을 촉구했고, 무로마치의 권력자들은 이 예언을 의식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거나 견제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서민들 사이에서까지 퍼져나가 예언 문화의 한 요소가 되었고, 이는 후대의 에도 괴담문학이나 예언소설 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이지 이후 근대에 들어서도 야마대시여서에 대한 언급이 끊기지 않았는데, 1875년에는 가부키 극으로 각색된 「기비 대신 중국담」이라는 공연에서 마키비가 거미의 힘으로 예언시를 해독하는 장면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에는 진다 쓰루마쓰(真田鶴松)라는 인물이 《야마대시 해설》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당대 일본의 국수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해 예언 내용을 애국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시의 마지막 구절 "망망수위공(茫茫遂爲空)"을 중국의 멸망으로, 반대로 일본은 “녹음이 짙은 미즈호의 나라, 동양 봉래도의 청구(靑丘)”로서 영원히 번영한다는 식으로 억지 해석하여 결론맺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에도 교토대학 다카세 다케지로(高瀬武次郎) 교수가 쓴 야마대시 관련 글에서, "푸른 언덕이 붉은 흙이 된다"는 구절을 폭격으로 산이 깎여 활주로가 된 모습에, "망망하여 결국 공허해진다"는 구절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에 견주는 등, 예언을 패전의 현실에 연결짓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시대를 막론하고 야마대시 예언은 필요에 따라 재해석되며 애용되었고, 때로는 국민적 위기감의 투영, 때로는 체제 옹호나 비판의 도구, 때로는 오락적 상상력의 소재로 기능해왔습니다.
5. 신빙성과 현대적 평가
야마대시여서의 신빙성은 앞서 언급했듯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예측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낮습니다. 예언서가 제시한 “백대 이후 왕통 단절”이라는 극단적 결말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일본 천황가는 현대까지 존속). 또한 예언에 묘사된 많은 부분은 특정 한 시대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보편적 역사 변화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두고 이후 세대가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야마대시여서는 실제 미래를 알아맞히는 예지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창작 당시의 시대정신과 문제의식을 반영한 문헌으로 평가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형태를 빌린 역사철학적 작품인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역사학자나 문학연구자들은 야마대시를 분석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종말론 인식과 정치적 상상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언서 자체에 내재한 가치(문학적 구성, 은유 등)와 더불어 그것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연구의 초점입니다.
영향력 면에서, 야마대시는 비록 공식 역사서에는 포함되지 않은 이차적인 문헌이지만, 그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예언시”라는 독특한 장르를 각인시켰고, 훗날 노스트라다무스 신드롬 등 외래 예언이 유행할 때에도 종종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학계 연구서 외에 대중서와 인터넷 매체에서 야마대시를 소개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에 와서는 이 예언서를 실제 미래예측으로 신봉하기보다는, 역사 미스터리나 문화사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큽니다. 요약하면, 야마대시여서는 한때 사람들을 두렵게도 하고 열광케도 했던 예언서였지만, 이제는 일본 중세사와 사상사의 한 페이지로서 그 의미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담고 있는 예언들은 현실에서 완벽히 맞아떨어지진 않았으나, 오히려 그러한 “틀림”과 끼워맞추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야마대시여서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 심성을 조망함으로써, 우리는 예언서가 가지는 신화적 영향력과 그 허구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참고문헌:
- 小峯和明, 『中世日本の予言書 ―〈未来記〉を読む』, 岩波書店, 2007.
- 小峯和明, 『「野馬台詩」の謎 歴史叙述としての未来記』, 岩波書店, 2003.
- 佐藤弘夫, 『偽書の精神史 神仏・異界と交感する中世』, 講談社, 2002.
- 일본어 위키피디아 「野馬台詩」 항목
- 江戸시대 괴담 블로그 「邪馬台詩:江戸時代に流行した予言の詩」 (2020)
- 중국어 번역 정리 블로그 「日本古代神秘預言-野馬台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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